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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내용 중 일부

작은 인간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 김찬호 (민음사)

  

 

 

작은 인간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인류학에서는 인간이라는 대상을 하나의 생물 종으로 파악하면서 그 생존의

문화적 비밀을 추적한다.

 

전환기일수록 자아와 세계에 대한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성찰이 요구되는데, 이 책을

그 화두가 될 만한 근원적인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겨온 과학의 성과들 속에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무시된 자료,

그리고 자의적으로 맺어진 인과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는 어떤 편견과 아집을 그 과학에 투영시켜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빈 해리스는 이 책에서 특히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권력 지향성

등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가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비서구 세계가 겪은 온갖 수모,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인종 청소 같은 행위 밑에는 그 정당성을 세워주는 논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소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부조리한 지배와 억압의 이면에도

견고한 의미 체계가 있다.

그러한 바탕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 학문이 가담한 혐의는 없는가?

 

'원시적인' 삶은 경멸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낭만적인 미화와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제 '미개'와 '문명'을 이분화시켜 흑백 논리로 가치를 매기는 단계는 넘어설 때가 됐다.

   

                                                                                                     - 김찬호 / 옮긴이

  

나는  인류학자로서 현대 교육 개혁의 최소 임무는 인간의 삶에 대해 비교문화적이고 범지구적이며 진화론적인 안목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범인류적이고 사회생물학적이며 진화론적인 관점을 옹호한다고 해서 각 지역들에 대한 종래의 특수한 지식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특수한 것만 강조하다 보면, 세계를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으로 들여다보는 안목을 잃는수가 있다.

 

물론 세상에는 예술과 정서적, 미적, 정서적 표현의 영역에서,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규명될 수 없고 오로지 특수한 내적 본질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유인원이 진화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그들만이 땅 위에서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그로써 일상의 욕수를 충족시켰다는 데 있다.

 

두뇌는 인간을 다른 짐승등과 구별시켜 주는 기관이다.

손이 제 아무리 재주가 좋은들 두뇌이 안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확실히 두뇌는 손의 능란함이 꽃 피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먼저 진화된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의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사람은 불과 6백만년 전만 해도 하나의 공통 조상이었다고

버클리 대학의 빈센트 사리히 교수는 추정한다.

30억 년 동안 생명의 나무는 자라면서 가지를 치고 싹을 틔웠다.

영장류에 속하는 큰 가지에는 유인원에 속하는 3천만 년된 가지다 달려 있다.

그 가지 끝의 싹에는 지금 살아 있는 아프리카 유인원들이 있다.

그 가까운 곳, 지금은 잎새들로 가려져 있는 어떤 지점에서 유인원 가지는 새 가지를 쳐서 우리 인류를 담고 있다.

우리 인류라는 생물종,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그 가지의 맨 끝에서 피어난 하나의 싹이다.

 

사람에게 잡힌 침팬지들이 도구를 정교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원인류의 도구 사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거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침팬지는 필요가 생기면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을 확대할 줄

안다는 점이다.

야생 상태에서 비교적 도구 사용이 드문 것은 지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그들은 대개 그냥 타고난 신체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비용-효과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직립을 하게 되면서 도구 사용의 비용-효과에 변화가 왔다.

이제 도구를 집어 운반하고 사용함으로써 그냥 맨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유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지금 침팬지들이 실험실이나 동물원에서 하는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어쩌다가 하는 것도, 긴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생활 양식의 중요한 일부로서 일상적으로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도구 사용과 직립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테크놀로지의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그들은 돌을 가지고 자르고 베고 쪼개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욱 대담한 생활 야식이 환하게 열리고 있었다.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런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인류는 석기 시대에서 출발하여 수렵 채취를 거쳐 오늘의 초산업 사회로 건너오는 데 불과

10만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에렉투스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시기의 8%에 지나지 않는다.

에렉투스가 살았던 130만 년 동안 그들의 생활 양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똑같았다는 것이다.

 

증발을 통한 냉각은 에텍투스를 장거리 달리기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혀줌으로써 인간을 어떤

동물보다 장거리 (사냥)에 능하도록 만들었다.

에렉투스가 장거리 주자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그 몸에 증발을 냉각 장치를 진화시켜 가기 위해서는 털 코트를 입을 수가 없었다.

공기는 땀샘에서 나온 습기의 얇은 막 위를 거침없이 지나가주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하게 '벌거벗은' 몸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아닌 영장류 가운데 초보적인 문화를 지닌 것은 아프리카 원숭이만은 아니다.

문화적인 인공물, 관행, 규칙, 관계 등이 우리 환경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 

먹고, 숨쉬고, 배설하고, 짝을 짓고, 자녀를 낳고, 앉고, 돌아다니고, 잠자고, 눕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사회의 문화의 어떤 측면을 따르거나 그것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우리의 문화는 성장하고 확장하며 진화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본질이다.

문화의 본질은 보통의 유기체적인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마치 유기체적 본질이 화학적, 물리적 토대에서 비롯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화의 도약을 바로 언어적 도약이다.

전통의 변화가 빠르고 누적적인 속도로 일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획득, 저장, 검색, 공유되는 정보의 양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의미한다.

그 변화의 속도와 정보의 양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인가의 언어는 인간의 기억이 개체와 세대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미디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베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진화가 일상 생활에 부과하는 바,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활동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 힘을 발휘한다.

언어적 능력은 시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의 행동 규칙까지도 정식화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작은 인간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인류학에서는 인간이라는 대상을 하나의 생물 종으로 파악하면서 그 생존의

문화적 비밀을 추적한다.

 

전환기일수록 자아와 세계에 대한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성찰이 요구되는데, 이 책을

그 화두가 될 만한 근원적인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합리적이라고 여겨온 과학의 성과들 속에 의도적 또는 비의도적으로 무시된 자료,

그리고 자의적으로 맺어진 인과 관계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우리는 어떤 편견과 아집을 그 과학에 투영시켜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빈 해리스는 이 책에서 특히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권력 지향성

등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가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비서구 세계가 겪은 온갖 수모,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인종 청소 같은 행위 밑에는 그 정당성을 세워주는 논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소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부조리한 지배와 억압의 이면에도

견고한 의미 체계가 있다.

그러한 바탕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 학문이 가담한 혐의는 없는가?

 

'원시적인' 삶은 경멸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낭만적인 미화와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제 '미개'와 '문명'을 이분화시켜 흑백 논리로 가치를 매기는 단계는 넘어설 때가 됐다.

   

                                                                                                     - 김찬호 / 옮긴이

  

나는  인류학자로서 현대 교육 개혁의 최소 임무는 인간의 삶에 대해 비교문화적이고 범지구적이며 진화론적인 안목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범인류적이고 사회생물학적이며 진화론적인 관점을 옹호한다고 해서 각 지역들에 대한 종래의 특수한 지식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특수한 것만 강조하다 보면, 세계를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으로 들여다보는 안목을 잃는수가 있다.

 

물론 세상에는 예술과 정서적, 미적, 정서적 표현의 영역에서,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규명될 수 없고 오로지 특수한 내적 본질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유인원이 진화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그들만이 땅 위에서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그로써 일상의 욕수를 충족시켰다는 데 있다.

 

두뇌는 인간을 다른 짐승등과 구별시켜 주는 기관이다.

손이 제 아무리 재주가 좋은들 두뇌이 안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확실히 두뇌는 손의 능란함이 꽃 피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먼저 진화된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의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사람은 불과 6백만년 전만 해도 하나의 공통 조상이었다고버클리 대학의 빈센트 사리히 교수는 추정한다.

30억 년 동안 생명의 나무는 자라면서 가지를 치고 싹을 틔웠다.

영장류에 속하는 큰 가지에는 유인원에 속하는 3천만 년된 가지다 달려 있다.

그 가지 끝의 싹에는 지금 살아 있는 아프리카 유인원들이 있다.

그 가까운 곳, 지금은 잎새들로 가려져 있는 어떤 지점에서 유인원 가지는 새 가지를 쳐서 우리 인류를 담고 있다.

우리 인류라는 생물종,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그 가지의 맨 끝에서 피어난 하나의 싹이다.

 

사람에게 잡힌 침팬지들이 도구를 정교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원인류의 도구 사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거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침팬지는 필요가 생기면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을 확대할 줄

안다는 점이다.

야생 상태에서 비교적 도구 사용이 드문 것은 지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그들은 대개 그냥 타고난 신체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비용-효과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직립을 하게 되면서 도구 사용의 비용-효과에 변화가 왔다.

이제 도구를 집어 운반하고 사용함으로써 그냥 맨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유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지금 침팬지들이 실험실이나 동물원에서 하는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어쩌다가 하는 것도, 긴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생활 양식의 중요한 일부로서 일상적으로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도구 사용과 직립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테크놀로지의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그들은 돌을 가지고 자르고 베고 쪼개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욱 대담한 생활 야식이 환하게 열리고 있었다.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런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인류는 석기 시대에서 출발하여 수렵 채취를 거쳐 오늘의 초산업 사회로 건너오는 데 불과

10만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에렉투스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시기의 8%에 지나지 않는다.

에렉투스가 살았던 130만 년 동안 그들의 생활 양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똑같았다는 것이다.

 

증발을 통한 냉각은 에텍투스를 장거리 달리기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혀줌으로써 인간을 어떤

동물보다 장거리 (사냥)에 능하도록 만들었다.

에렉투스가 장거리 주자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그 몸에 증발을 냉각 장치를 진화시켜 가기 위해서는 털 코트를 입을 수가 없었다.

공기는 땀샘에서 나온 습기의 얇은 막 위를 거침없이 지나가주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하게 '벌거벗은' 몸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아닌 영장류 가운데 초보적인 문화를 지닌 것은 아프리카 원숭이만은 아니다.

문화적인 인공물, 관행, 규칙, 관계 등이 우리 환경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 

먹고, 숨쉬고, 배설하고, 짝을 짓고, 자녀를 낳고, 앉고, 돌아다니고, 잠자고, 눕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사회의 문화의 어떤 측면을 따르거나 그것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우리의 문화는 성장하고 확장하며 진화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본질이다.

문화의 본질은 보통의 유기체적인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마치 유기체적 본질이 화학적, 물리적 토대에서 비롯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화의 도약을 바로 언어적 도약이다.

전통의 변화가 빠르고 누적적인 속도로 일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획득, 저장, 검색, 공유되는 정보의 양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의미한다.

그 변화의 속도와 정보의 양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인가의 언어는 인간의 기억이 개체와 세대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미디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베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진화가 일상 생활에 부과하는 바,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활동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 힘을 발휘한다.

언어적 능력은 시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의 행동 규칙까지도 정식화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언어적인 규칙을 통한 행위를 뛰어나게 수행하는 인간은 사회적 역할을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젼시키고 집단을 이루어 서로 협동하는 면에서 다른 동물들을 쉽게 능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적 탁월함은 뇌가 확대되고 재구성된 회로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우리가 유아기에서 유년기로 이행하면서 언어적 능력을 획득하도록 돕는 인간 특유의 신경 프로그램에 기초한 것인가?

 

하와이 대학 비케르톤 교수는 현대인의 뇌에 문법적으로 적합한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청사진이 생물학적 프로그램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일반 개념이나 특수 개념의 많고 적음이 진화론적인 단계와 무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런 개념의 문화적인 필요를 반영할 뿐이다.

 

지금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 3천 여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공통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언어인류학자 에드워드 사이어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아직도 건재하다.

" 언어의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플라톤과 마케도니아 양돈가가 함께 걷고,

  공자와 아쌈의 머리 사냥하는 야만인이 함께 걷는다."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 인간의 폭력성과 권력 지향성

등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가한다.

지난 몇 세기 동안 비서구 세계가 겪은 온갖 수모, 그리고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인종 청소 같은 행위 밑에는 그 정당성을 세워주는 논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소한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는 부조리한 지배와 억압의 이면에도

견고한 의미 체계가 있다.

그러한 바탕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 학문이 가담한 혐의는 없는가?

 

'원시적인' 삶은 경멸이나 극복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낭만적인 미화와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이제 '미개'와 '문명'을 이분화시켜 흑백 논리로 가치를 매기는 단계는 넘어설 때가 됐다.

   

                                                                                                     - 김찬호 / 옮긴이

 

 

나는  인류학자로서 현대 교육 개혁의 최소 임무는 인간의 삶에 대해 비교문화적이고 범지구적이며

진화론적인 안목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범인류적이고 사회생물학적이며 진화론적인 관점을 옹호한다고 해서 각 지역들에 대한 종래의

특수한 지식들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특수한 것만 강조하다 보면, 세계를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으로 들여다보는 안목을 잃는

수가 있다.

 

물론 세상에는 예술과 정서적, 미적, 정서적 표현의 영역에서, 총체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규명될 수 없고 오로지 특수한 내적 본질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

 

 

두 발과 두 손을 가진 유인원이 진화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그들만이 땅 위에서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손으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그로써 일상의 욕수를 충족시켰다는 데 있다.

 

 

두뇌는 인간을 다른 짐승등과 구별시켜 주는 기관이다.

손이 제 아무리 재주가 좋은들 두뇌이 안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확실히 두뇌는 손의 능란함이 꽃 피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먼저 진화된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의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사람은 불과 6백만년 전만 해도 하나의 공통 조상이었다고

버클리 대학의 빈센트 사리히 교수는 추정한다.

30억 년 동안 생명의 나무는 자라면서 가지를 치고 싹을 틔웠다.

영장류에 속하는 큰 가지에는 유인원에 속하는 3천만 년된 가지다 달려 있다.

그 가지 끝의 싹에는 지금 살아 있는 아프리카 유인원들이 있다.

그 가까운 곳, 지금은 잎새들로 가려져 있는 어떤 지점에서 유인원 가지는 새 가지를 쳐서 우리 인류를

담고 있다.

우리 인류라는 생물종,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그 가지의 맨 끝에서 피어난 하나의 싹이다.

 

 

사람에게 잡힌 침팬지들이 도구를 정교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원인류의 도구 사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거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침팬지는 필요가 생기면 도구의 제작 및 사용을 확대할 줄

안다는 점이다.

야생 상태에서 비교적 도구 사용이 드문 것은 지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동기 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그들은 대개 그냥 타고난 신체 장비를 사용함으로써 비용-효과적인 방식으로 일상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직립을 하게 되면서 도구 사용의 비용-효과에 변화가 왔다.

이제 도구를 집어 운반하고 사용함으로써 그냥 맨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데 유리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지금 침팬지들이 실험실이나 동물원에서 하는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어쩌다가 하는 것도, 긴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 생활 양식의 중요한

일부로서 일상적으로 도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도구 사용과 직립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진화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테크놀로지의 돌파구를 찾아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것이었다.

그들은 돌을 가지고 자르고 베고 쪼개는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더욱 대담한 생활 야식이 환하게 열리고 있었다.

 

 

자연 선택은 누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었을까?

최상의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가장 빨리 익히고 그것을 언제 사용하는지를 가장 현명하게 결정하며,

계절에 따라 동식물의 번식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에 맞춰 생산을 최대화하는 개체들이었다.

바로 그런 선택의 결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보다 하빌리스의 뇌가 40-50% 더 커졌다고

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인류는 석기 시대에서 출발하여 수렵 채취를 거쳐 오늘의 초산업 사회로 건너오는 데 불과

10만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에렉투스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시기의 8%에 지나지 않는다.

에렉투스가 살았던 130만 년 동안 그들의 생활 양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똑같았다는 것이다.

 

 

증발을 통한 냉각은 에텍투스를 장거리 달리기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혀줌으로써 인간을 어떤

동물보다 장거리 (사냥)에 능하도록 만들었다.

에렉투스가 장거리 주자로서 생활을 영위하고 그 몸에 증발을 냉각 장치를 진화시켜 가기 위해서는

털 코트를 입을 수가 없었다.

공기는 땀샘에서 나온 습기의 얇은 막 위를 거침없이 지나가주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하게 '벌거벗은' 몸을 갖게 되었다.

 

 

인간이 아닌 영장류 가운데 초보적인 문화를 지닌 것은 아프리카 원숭이만은 아니다.

 

문화적인 인공물, 관행, 규칙, 관계 등이 우리 환경의 가장 커다란 부분을 이룬다. 

먹고, 숨쉬고, 배설하고, 짝을 짓고, 자녀를 낳고, 앉고, 돌아다니고, 잠자고, 눕고 하는 모든 행위 속에서 사람은 반드시 자기 사회의 문화의 어떤 측면을 따르거나 그것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우리의 문화는 성장하고 확장하며 진화한다.

그것이 우리 문화의 본질이다.

문화의 본질은 보통의 유기체적인 본질에서 비롯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마치 유기체적 본질이 화학적, 물리적 토대에서 비롯되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화의 도약을 바로 언어적 도약이다.

전통의 변화가 빠르고 누적적인 속도로 일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획득, 저장, 검색, 공유되는 정보의 양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의미한다.

그 변화의 속도와 정보의 양은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인가의 언어는 인간의 기억이 개체와 세대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미디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베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 진화가 일상 생활에 부과하는 바,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활동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능동적 힘을 발휘한다.

언어적 능력은 시공간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 속에서의 행동 규칙까지도 정식화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언어적인 규칙을 통한 행위를 뛰어나게 수행하는 인간은 사회적 역할을 복잡하고 다양하게 발젼시키고 집단을 이루어 서로 협동하는 면에서 다른 동물들을 쉽게 능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적 탁월함은 뇌가 확대되고 재구성된 회로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가? 아니면

우리가 유아기에서 유년기로 이행하면서 언어적 능력을 획득하도록 돕는 인간 특유의 신경 프로그램에 기초한 것인가?

 

하와이 대학 비케르톤 교수는 현대인의 뇌에 문법적으로 적합한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청사진이

생물학적 프로그램으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일반 개념이나 특수 개념의 많고 적음이 진화론적인 단계와 무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런 개념의 문화적인 필요를 반영할 뿐이다.

 

지금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 3천 여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공통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언어인류학자 에드워드 사이어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아직도 건재하다.

 

" 언어의 형식에 관해 말하자면, 플라톤과 마케도니아 양돈가가 함께 걷고,

  공자와 아쌈의 머리 사냥하는 야만인이 함께 걷는다."